[CD] Joseon Project 1
Outline
주제 : 왕의 평가와 발간된 서적 수에 대한 상관관계 분석
1. 왕의 대한 평가 크롤링 후 1~5단계로 나눔
1-1. 나무위키에서 “왕이름(조선)/평가” 부분을 찾아서 크롤링 한다. (없는 왕도 있음. 없으면 pass)
1-2. 자연어 처리를 통해 왕 평가를 요약 및 감성분석 진행. (평가를 1점에서 5점으로 분류)
2. 조선시대 고전 책자 데이터 크롤링
2-1. 아래 사이트에 발간 년도가 정리되어있음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list?qw=&q=&grpId=&itemId=MO&gubun=book&cate1=&cate2=&upSeoji=&listType=&sortField=&sortOrder=&pageIndex=8&pageUnit=20”
2-2. 왕에 대해서 크롤링할 때 재위 년도도 크롤링해서 재위 년도와 맞춰서 책자 분류
2-3. 책자 수 정리
3. 왕의 평가와 발간된 서적의 수에 대한 상관관계 분석
3-1. 왕의 대한 평가가 좋으면 이룬 것이 많거나 백성들의 삶이 좋았을 것으로 추정가능하므로 서적이 많이 발간되었을 거라고 유추 가능
3-2. 실제 상관관계가 있는지 분석
1. 위키백과 왕 전체 텍스트 크롤링
# 위키백과 국왕 전체 텍스트 크롤링 (R)
#full text
library(rvest)
# 1. 조선 국왕 리스트
kings <- c("태조_(조선)", "정종_(조선)", "태종_(조선)", "세종", "문종_(조선)", "단종_(조선)", "세조_(조선)", "예종_(조선)", "성종_(조선)", "연산군",
"중종_(조선)", "인종_(조선)", "명종_(조선)", "선조_(조선)", "광해군", "인조_(조선)", "효종_(조선)", "현종_(조선)", "숙종_(조선)", "경종_(조선)",
"영조_(조선)", "정조_(조선)", "순조_(조선)", "헌종_(조선)", "철종_(조선)", "고종_(조선)", "순종_(조선)")
# 2. 새로운 폴더 생성 (파일 저장할 위치)
dir.create("kings_full_texts", showWarnings = FALSE)
# 3. 모든 국왕의 위키백과 본문 크롤링 & 저장
for (king in kings) {
# 왕의 위키백과 URL 만들기
url <- paste0("https://ko.wikipedia.org/wiki/", king)
# HTML 읽기
page <- try(read_html(url), silent = TRUE)
if (inherits(page, "try-error")) {
print(paste("페이지 오류:", king))
next
}
# 본문 전체 가져오기
full_text <- page %>%
html_nodes("#mw-content-text") %>%
html_text(trim = TRUE)
# 텍스트 파일로 저장
file_name <- paste0("kings_full_texts/", king, ".txt")
writeLines(full_text, file_name, useBytes = TRUE)
print(paste("저장 완료:", file_name)) # 진행 상황 출력
}
print("모든 국왕의 위키백과 본문을 텍스트 파일로 저장 완료!")
2. 나무위키 크롤링
-
위키백과에서는 왕의 평가가 비어있는 문서가 많아서 나무위키에서도 크롤링 하였음.
# 나무위키 크롤링 (python)
#(나무위키 자체는 보안정책?으로 막혀서 나무위키 미러사이트에서 크롤링 함)
import requests
from bs4 import BeautifulSoup
# 미러 사이트 URL (조선 군주)
url = "https://namu.moe/w/태조(조선)"
headers = {
'User-Agent': 'Mozilla/5.0 (Windows NT 10.0; Win64; x64) AppleWebKit/537.36 (KHTML, like Gecko) Chrome/119.0.0.0 Safari/537.36'
}
response = requests.get(url, headers=headers)
soup = BeautifulSoup(response.text, 'html.parser')
text = soup.get_text()
# 저장
with open("joseon_kings_from_namu_mirror.txt", "w", encoding="utf-8") as f:
f.write(text)
print("미러사이트에서 조선 국왕 정보 저장 완료!")
import requests
from bs4 import BeautifulSoup
import os
# 조선 국왕 리스트
kings = [
"태조(조선)", "정종(조선)", "태종(조선)", "세종", "문종(조선)", "단종(조선)", "세조(조선)", "예종(조선)", "성종(조선)", "연산군",
"중종(조선)", "인종(조선)", "명종(조선)", "선조(조선)", "광해군", "인조", "효종(조선)", "현종(조선)", "숙종(조선)", "경종(조선)",
"영조(조선)", "정조(조선)", "순조", "헌종(조선)", "철종(조선)", "고종(조선)", "순종(조선)"
]
# 헤더
headers = {
'User-Agent': 'Mozilla/5.0 (Windows NT 10.0; Win64; x64) AppleWebKit/537.36 (KHTML, like Gecko) Chrome/119.0.0.0 Safari/537.36'
}
# 저장 폴더 생성
output_folder = "joseon_kings_txt"
os.makedirs(output_folder, exist_ok=True)
# 각 왕별 파일 저장
for king in kings:
url_name = king.replace(" ", "_") # 공백 URL 인코딩
url = f"https://namu.moe/w/{url_name}"
try:
response = requests.get(url, headers=headers)
response.raise_for_status()
soup = BeautifulSoup(response.text, 'html.parser')
page_text = soup.get_text()
# 파일 이름 깨짐 방지용 (괄호 포함된 이름은 윈도우에서 에러날 수도 있어서 안전하게 처리)
safe_filename = king.replace("/", "_")
with open(f"{output_folder}/{safe_filename}.txt", "w", encoding="utf-8") as f:
f.write(page_text)
print(f"✅ {king} 저장 완료: {safe_filename}.txt")
except Exception as e:
print(f"❌ {king} 저장 실패: {e}")
print("\n🎉 모든 조선 국왕 파일 저장 완료!")
3. 고전서적 DB 크롤링
# 고전 db 크롤링 (python)
!pip install playwright
!playwright install
import asyncio
from playwright.async_api import async_playwright
import pandas as pd
async def run():
data = []
async with async_playwright() as p:
browser = await p.chromium.launch(headless=True)
page = await browser.new_page()
# 원하는 페이지 수만큼 반복
for i in range(1, 14): # 예: 1~13페이지까지
print(f"크롤링 중: {i}페이지")
url = f"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list?qw=&q=&grpId=&itemId=MO&gubun=book&cate1=&cate2=&upSeoji=&listType=simple&sortField=&sortOrder=&pageIndex={i}&pageUnit=100"
await page.goto(url)
await page.wait_for_timeout(2000) # JS 로딩 시간 대기
rows = await page.query_selector_all("tbody > tr")
for row in rows:
cols = await row.query_selector_all("td")
if len(cols) >= 4:
title = await cols[0].inner_text()
author = await cols[1].inner_text()
year = await cols[2].inner_text()
collection = await cols[3].inner_text()
data.append({
"서명": title,
"저자": author,
"간행년": year,
"집수명": collection
})
await browser.close()
# DataFrame 생성 및 저장
df = pd.DataFrame(data)
df.to_csv("itkc_books.csv", index=False)
print("CSV 저장 완료!")
# 비동기 실행
await run()
4. 위키백과에서 왕의 평가 추출
-
위키백과에서 평가 추출
import os
import re
def extract_evaluation(text):
pattern = r"(평가(?:와 비판)?\[편집\]\n)(.*?)(?=\n[^ \n]{1,30}\[편집\])"
match = re.search(pattern, text, re.DOTALL)
if match:
return match.group(2).strip() # group(1)은 제목, group(2)가 본문
return "평가 없음"
# 모든 .txt 파일이 있는 폴더 경로
folder_path = "WIKI_kings"
# 결과 저장할 딕셔너리
evaluation_results = {}
# 폴더 내 모든 .txt 파일 읽기
for filename in os.listdir(folder_path):
if filename.endswith(".txt"): # txt 파일만 처리
file_path = os.path.join(folder_path, filename)
with open(file_path, "r", encoding="utf-8") as f:
text = f.read()
# 평가 부분 추출
evaluation = extract_evaluation(text)
evaluation_results[filename] = evaluation
# 결과 출력
for file, evaluation in evaluation_results.items():
print(f"📂 {file}:\n{evaluation}\n{'-'*40}")
📂 정조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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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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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_(조선).txt: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영민하고 대범하고 냉철하였다.[35] 이는 빛나는 다음 시대를 열기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악업(惡業)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으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조선을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리고 손자인 세조와 놀랍도록 유사한 점이 많다. 군왕의 권력이 신하의 권력보다 우위여야 한다고 평생을 믿었던 인물이다. 훗날 세조와 비교해 볼 때, 쿠데타로 즉위한 인물로서의 공통점은 있지만, 사후 처리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즉, 세조는 왕위 등극 후에 공신을 우대해 줘서 이들에게 공을 치하했지만, 태종은 반대로 공신을 비롯하여 왕실의 종친들마저 처형하는 등, 후계자의 후환을 미리 제거하였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이 덕분에 강력한 왕권을 지닌 왕이 된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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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_(조선).txt:
옛으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인조는 조선 최악의 왕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만약 그가 세계정세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더라면 병자호란과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잇따른다. 친명배청주의자인 인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은 외교 기조를 실리외교에서 친명외교로 바꾸었다. 그래서 광해군의 밀명을 받아 청에게 항복했던 강홍립, 박난영의 일가친척을 전부 몰살시켰고 척화파를 중용하였다.
그리고 인조는 청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겠다고 타협책을 제시한 후 강홍립의 숙부인 강인을 가짜 형조판서로 꾸며 회답서를 보냈으나 이 문서엔 명이 내려준 연호를 사용하는 등 청을 자극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분노한 청나라 사신은 4만 필의 옷감과 소 4천 마리를 제공하지 않으면 화의는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조선은 할 수 없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다른 일화도 있다. 병자호란 중에 청나라가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해 "임금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면 항복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병력을 물리겠다"고 제안하자 인조는 다른 사람을 보냈으나 용골대가 본인들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이번엔 세자를 요구했다. 이처럼 인조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에서도 꼭 손해를 보았다.
가족 관계[편집]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대왕仁祖大王
출생
사망
1595년 11월 27일 (음력 11월 7일)
조선 황해도 해주 정원군 잠저
1649년 6월 7일 (음력 5월 8일) (53세)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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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_(조선).txt:
학문을 좋아하고 우애와 효심이 깊어 유교의 이상적 군주로 일컬어졌다. 당대의 기록을 비롯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세종, 문종, 성종, 정조와 더불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왕의 학문을 예찬하고 인품과 성품을 칭송한 기록이 남아있는 몇 안되는 군주 중 하나이다.[주해 4][주해 5][주해 6]
가족 관계[편집]
출생
사망
조선 제12대 국왕
인종대왕仁宗大王
1515년 3월 20일 (음력 2월 25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1545년 8월 17일 (음력 7월 1일) (30세)
조선 한성부 경복궁 청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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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txt:
반정 이후 조선 후반기 내내 친형 임해군을 죽인 패륜사건과 폐모살제(영창대군 살해와 인목왕후 폐위)를 이유로 연산군에 이어 패륜의 군주로 규정되어 왔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 중 강홍립을 파견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점 역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고 사대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되어 반정(1623) 이후 조선 시대 내내 광해군은 폭군 또는 혼군(昏君), 즉 판단이 흐리고 어리석은 임금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49][50]그러나 1933년에 이나바 이와키치가 《광해군시대의 만주와 조선의 관계》라는 저술에서 광해군이 실리외교 혹은 중립외교를 펼쳤다는 긍정적 평가가 등장하면서[49] 여러모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폭군으로서의 이미지가 많이 희석이 되고 있다. 물론 내치의 붕괴로 인해 소극적인 외교를 펼친 결과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궁궐을 지어 경제가 파탄났다. 이 점은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명기 교수 조차도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 정책을 궁궐 공사로 모두 말아 먹었다" 라며 비판하고 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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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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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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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종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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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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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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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종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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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조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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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종_(조선).txt:
《명종실록》에서는 명종과 명종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천성이 자효(慈孝)하고 공근(恭勤)하였으며 본디 문예(文藝)를 좋아하였다.그러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비(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으므로
정치가 외가에 의해 좌우되었다.그리하여 많은 간사한 이들이 득세하여 선량한 신하들이 많이 귀양 가거나 살해되었으므로
주상의 형세는 외롭고 위태로웠다.친정한 뒤에도 오히려 외척을 믿고 환관을 가까이하여 정치가 날로 문란해지더니,
끝내는 다행히 깨달아서 이량(李樑)과 윤원형(尹元衡)의 무리를 내쳤으므로
국가가 다시 안정되었다.— 《명종실록》 3권, 총서
아아, 상(명종)께서는 총명하고 예지의 덕이 있었는데도 국가에 베풀지 못했다.
아아, 상께서는 어둡거나 탐혹 잔인한 잘못이 없었는데도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상이 군자(君子)를 쓰려고 하면 소인(小人)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죽여 버리고,
소인을 제거하려고 하면 소인이 자기에게 붙좇는 것을 이롭게 여겨서 서로 이끌어 나왔다.아아, 상이 재위한 20년 동안 덕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나라에 해를 끼친 것은 모두 소인들의 소행인데도 잘못은 모두 상에게로 돌아갔다.아아, 상의 말년에는 전날의 잘못을 뉘우쳐 권간을 제거하고
여러 현인을 신원 석방하여 말년의 효과를 거두게 되었는데,
하늘이 나이를 빌려주지 않아 갑자기 훙서하시어
사방과 후세로 하여금 다만 상의 실덕(失德)만 알게 하고
상의 성덕(聖德)이 일식(日蝕)이 끝나면 다시 밝아지는 것과 같이
우러러볼 만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게 했다.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피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하겠다.
아아, 슬픈 일이다. 아, 불행한 것은 오직 상뿐인저.문정왕후(文定王后)를 어머니로 두었고 윤원형(尹元衡)을 신하로 두어
어머니는 불선(不善)을 가르치고 신하는 그 가르침에 순순히 따랐다.아아, 상이 요순(堯舜)처럼 훌륭한 임금이 되지 못한 것은
상하의 보좌와 교도가 없었기 때문이니,
아아, 슬픈 일이다.— 《명종실록》 34권 명종 22년(1567년 명 가정(嘉靖) 46년) 6월 28일 (신해) 12번째 기사
상(명종)이 어릴 때 즉위하여 타고난 자질이 영명하였으니
보도하는데 올바른 사람이 있고 훈적(訓迪)하는데 바른 방법이 있었다면
좋은 교화를 일으키고 훌륭한 다스림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권간들이 서로 잇달아 용사하여 착한 사람들을 원수로 삼고 조정을 어지럽히자,
탐풍(貪風)이 크게 일고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아
국사가 날로 그릇되어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다.다행히 묘사(廟社)의 신령께서 가만히 성상의 마음을 이끌어 주심에 힘입어
공론을 채납하여 간사한 무리들을 물리치시니
국시(國是)가 조금 정해지고 사기(士氣)가 조금 진작되었다.그렇지 않았으면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다.— 《명종실록》 34권 명종 22년(1567년 명 가정(嘉靖) 46년) 같은 달 같은 날 기사가족 관계[편집]
출생
사망
조선 제13대 국왕
명종대왕明宗大王
1534년 7월 13일(음력 5월 22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1567년 8월 12일(음력 6월 28일) (33세)
조선 한성부 경복궁 양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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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종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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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_(조선).txt:
긍정적 평가[편집]
개국 이전[편집]
고려말 왜구와 홍건적을 비롯한 북로남왜 외침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동북면도의 군벌이었던 이성계는 수많은 전투를 벌이며 당대 동북아에서 고려로 침입한 모든 적들과 싸워 승리해 백성과 고려를 구하며 조정과 민간에서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당대 고려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서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였고, 명문 권문 세가인 조준이 고려 체제에서 이탈해 새 왕조 건설에 협력한 것은 상징적이었다.[76] 전설적인 전쟁 영웅이었던 이성계를 중심으로 조준, 남은, 정도전, 윤소종 등의 급진개혁파 사대부들이 견인한 조선 왕조 개창은 단순한 왕조 교체 역성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사상 등 여러 방면에서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대사건이었고,[77] 고려 말 일대 사회 개혁의 최종 단계였으며 태조와 조선 개국 공신들은 권력과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사회 개혁을 시행한 끝에 새 왕조를 개창했다.[78]
개국 이후[편집]
내치
태조는 새 왕조 개창 이후 강력한 왕권을 가졌으면서도 왕권을 강화하기보다 국왕으로서 국가 기틀 정비에 더 충실했고[79] 재위 기간에 비교해서도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조준, 윤소종, 남은, 정도전, 하륜, 권근, 성석린, 성석용, 유관, 맹사성, 허조, 허주 등 관학파 주요 인재들을 모두 등용했으며, 창업 군주로서 법률 정립에 강력한 의지를 보여 성종 대까지 통치규범체제 확립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을 떼었다.[80][81] 또한 4품 이상 고위 관료 임용을 서경이 아닌 국왕의 주관으로 개혁하여 도평의사사에서 권신과 국왕의 측근들이 인사권을 장악한 폐단을 혁파했고 고려의 과거제도를 정체시킨 지공거 제도를 즉위 직후 폐지하는 등, 고려 말부터 즉위 이후까지 지속적 개혁을 통해 국가 기틀을 정비하고 태종과 세종 대 조선이 나아갈 방향성을 지정하였다.
외치
부정적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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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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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종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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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종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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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_(조선).txt:
긍정적인 평가[편집]
외국인들의 개인적인 견해[편집]
고종 황제를 직접 만나본 외국인들은 대체로 고종의 해박한 지식과 과감한 정치 감각에 호의를 보였다.[52]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는 “고종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극심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고종이 민비 일가에게 끌려 다녔다는 그간의 평가와는 대조를 이룬다.[4]스워터트는 미국인 데니(O. Denny)[53] 가 남긴 평가, 즉 “고종은 위대한 국가의 지배자다운 강건, 낙관 및 인내를 보였다.”라는 평가를 지지하면서, 위 해링턴 연구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데니는 본래 이홍장이 자신의 조선 속방화 정책을 조력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조선 정부에 추천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고종의 고문이 된 데니는 자신의 나라를 독립국으로 보존하려는 개군주의 노력에 감동하여 오히려 청나라에 대해 조선을 변호하는 일을 업무로 삼아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특별한 이력은 조선의 평가 자체에 대해 신뢰성을 더해 준다. 그리고 고종이 고빙한 서양인 고문중 한 사람이자 개신교 선교사였던 헐버트(Homer Hulbert)는 고종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강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황제가 “유약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견해는 틀렸다.”면서 고종이 주권 수호에 대한 확고한 의지 아래 사생결단의 조치를 단행했던 것들을 열거하였다.[4]또한 1895년에 한성신문 기자로서 을미사변에 직접 가해자로 참여하기도 했던 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쓴 《근대조선사》 상·하(1936년, 1939년, 鷄鳴社, 京城)에서 상당히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기쿠치는 《근대조선사》를 쓰기에 앞서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고종태황제실록》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자료를 모으게 된다. 그의 논조는 대체로 《코리아 레퍼지터리》와 유사하여, 고종이 암군이 아닌 명군이었으며, 단지 열강에 포위되어 내정보다는 외교에 힘쓰다가 국세를 끝내 세우지 못한 불운한 군주라고 묘사하였다. 또한 기쿠치는 다른 일본 학자가 거론하지 않은 평양 이궁 조영(造營)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그러한 고종의 치적을 제정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가 나빠짐에 대비한 시책이라고 평가하였다.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는데, 그 친서에는 일본이 황성을 침탈하게 됨을 고종이 이미 예측하였음이 밝혀져 있고, 이러한 동맹 요청을 평양 이궁 조영의 연장으로 보았다. 그밖에도 고종 시기에 설치된 각종 근대적 기구나 받아들여진 서양 문물을 개화파나 독립협회의 치적으로 보지 않고 고종의 업적으로 평가하였으며, 오히려 일본에 합병됨으로써 결실을 보지 못하고 산멸했다고 보았다.[4]
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견해[편집]
고종에 대한 서양인의 평가[54]는 1896년 10월에 간행된 《코리언 레퍼지터리》 3권 11책에 실린 〈한국의 국왕 폐하〉(His Majesty, The King of Korea)의 글이 가장 자세하다. 그 글에서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일본으로부터 벗어난 뒤, 대한제국으로의 새로운 출범을 내다보면서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것도 서양인들(코리언 레퍼지터리 잡지의 편집자들)의 시점에 따라 씌었기 때문에 객관성이 인정된다. 그들이 특별히 한국의 국왕에게 아첨을 떨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고종의 교육 수준에 대해 폐하는 한문과 한글에 숙달하여 있다고 하였고, 국왕 자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나라 안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신하들이 잘 모르고 있는 전통 등에 대해 국왕에게 물으며 그가 답해 주기도 한다고 적혀 있다. 국왕의 집무에 대해서도 매우 부지런하며,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해낸다고 평을 하였다.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도 호평하여, 진보적이며 또한 다른 동양 나라와는 달리 서양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에 젖어 있지 않으며, 교육적인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며, 그리고 최근 수년 안에 이런 진보적 방향에서 물질적인 진보들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종교 면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탄압했던) 대원군 집권 때와는 달리 관용으로 일관하였다. 국왕의 성격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상냥하며 자비롭다고 말하면서 기자는 진실로 그의 나라의 복지와 진보를 열망하고 있다고 적었다.[54]
부정적인 평가[편집]
정치적 능력[편집]
1883년 조선에 진주한 위안 스카이는 고종을 '혼군'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스무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55]미국의 언론인 데넷 타일러(Dennett Tyler)의 견해는 부정적이다. 그는 1905년 황제와 조정 관료의 을사조약 무효화 운동 때 11월 25일자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루트(Root)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과 12월 19일 루트가 민영찬 공사에게 보낸 회신 등을 근거로, 루스벨트나 루스는 “한 점 잘못 없이” 객관적 사실에 의거하여 합당한 외교 조치를 취하였다고 평가하면서, 잘못은 오히려 고종 측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심지어 “대한제국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루스벨트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황제에 의해 배신당했다.”라고 극언하였다. 그의 견해는 고종의 인물평이라기보다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이지만, 1920년대에 제기되어 그 이후의 부정적 견해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4]즉위 초반에는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 의해, 즉위 중반에는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것과 즉위 후반에는 명성황후가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이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때 그의 신하였던 윤치호는 '용모가 상당히 출중했다.[56]'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윤치호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공인으로서는 신망을 얻지 못한 점에서 영국의 찰스 1세와 유사하다.[56]'고 평가했다. 윤치호는 자신의 윤치호 일기에서 조선은 유교 국가인데 그런 나라의 임금이면서도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임종은커녕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며, 유교적 기준에 의하면 고종은 패륜을 저지른 왕이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또한 권력의 부패는 민중의 저항을 야기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명성황후는 죽을 위기를 넘겨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되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대원군 덕분에 권력을 행사하기 어렵게 된 고종이나 명성황후의 입장에서는 이 현상을 타개할 묘안을 찾아야 했고, 명성황후는 은밀한 서한을 고종에게 보냈다. 청나라 군대의 파병 요청이 그것이었다. 남의 나라 군대를 빌려 국내의 권력다툼을 해결하고자 했던 장본인이 바로 이 고종과 명성황후였고, 그 뒤 외세가 툭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우리를 협박한 빌미를 제공한 것도 이들이었다.
청나라 군대 때문에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된 고종과 민씨 척족들이 한동안 친일적이던 외교정책을 친청으로 바꿀 것은 당연했다. 갑신정변 실패 뒤 청국은 원세개를 보내 조선을 속국처럼 다루었다. 아무리 고종이 청나라에 기대 권력을 유지하는 처지지만 청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나 미국을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려 했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나름대로 자주적 외교정책을 내세웠다는 평가가 가능할 정도로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 자주적 외교정책은 국권의 확보를 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조선에서 고종 자신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는 청과 감국으로 파견된 원세개에 대한 반발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에 대한 외세의 침해가 일차적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농민전쟁에 대응하는 고종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청나라 병사로 막아내자.”[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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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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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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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txt:
《세종실록》에서는 세종과 세종의 치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영민하고 총명했으며 강인하고 과감했다.
침착하고 굳세며 너그럽고 후덕했다.
관대하고 부드러우며 어질고 자애로웠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타고난 천성이었다. — 《세종실록》 1권, 총서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며,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즉위함에 미쳐, 매일 사야(四夜) 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고, 다음 경연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또 처음으로 집현전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顧問)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 없이 잘 되었고, 예악(禮樂)의 문(文)을 모두 일으켰으며,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 같은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하였으며,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들이 이간질하는 말을 못하였다.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간(諫)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하였고, 이웃나라를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 《세종실록》 127권,세종 32년(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2월 17일 (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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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_(조선).txt:
조선왕조실록[편집]
《중종실록》의 사관은 중종과 중종 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사신은 논한다.
상(중종)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 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었다.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지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에 다스려진 때는 적었고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소강(小康)의 효과도 보지 못했으니 슬프다.
사신은 논한다.
인자하고 공검한 것은 천성에서 나왔으나 우유부단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이끌려
견성군(甄城君)을 죽여 형제간의 우애가 이지러졌고,
신비(愼妃, 단경왕후)를 내치고 박빈(朴嬪, 경빈 박씨)을 죽여 부부의 정이 없어졌으며
복성군(福城君)과 당성위(唐城尉)를 죽여 부자간의 은의(恩義)가 어그러졌고,
대신을 많이 죽이고 주륙(誅戮)이 잇달아 군신의 은의가 야박해졌으니 애석하다.
— 《중종실록》 105권,중종 39년(1544년 명 가정(嘉靖) 23년) 11월 15일 (경술)
가족 관계[편집]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 中宗
출생
사망
1488년 4월 16일 (음력 3월 5일)
조선 한성부
1544년 11월 29일 (음력 11월 15일) (56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환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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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종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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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종_(조선).txt:
평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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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_(조선).txt:
긍정적 평가[편집]
글씨에 뛰어났다는 평이 있다.
왕권을 강화했고 국방을 튼튼히 했으며,[9] 또 비록 그의 집권을 죽음으로써 막으려 했던 이른바 사육신 문제로 그들의 아지트였던 집현전은 폐지했으나, 법전이라든지 역사서 같은 공익적 편찬 사업을 주도하는 등, 학문을 발전시킨 공적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9] 그밖에 호불(護佛)의 군주였다는 평도 있다.[9]세조의 치세 동안 신권이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왕권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아닌 강압적인 철권 통치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새로운 인재들을 과감히 발탁하기 보다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측근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부정적 평가[편집]
문단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세조 (조선)에서 나누어 주세요.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 (2021년 6월)계유정난을 명목으로 조카 단종을 축출하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노산군으로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에 의해 등용된 사림파에 의해 오랫동안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세조가 문종의 사망 이전부터 왕권을 탈취하려 했으며 그 결과 자신의 형인 문종을 독살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24] 문종의 의관 전순의(全循義)를 시켜 문종의 병을 고의로 악화시켜 빨리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왕이 사망할 경우 큰 벌을 받는게 일반적이었으나 의관 전순의는 작은 형벌에 그쳤다가 다시 복귀받았으며 수양이 왕이 된 이후에 일개 의관 신분으로 일등공신으로까지 책봉을 받는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혹을 주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가지 정황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자신이 악몽을 꾸었다는 이유로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단종의 어머니. 단종을 낳은지 3일만에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남)의 능을 파헤치고 부관참시하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출처 필요]또한 자신의 정통성이 약하다보니 지나치게 공신에 의존하는 정치를 펼쳐 공신들의 무법천지가 이루어지게 된다. 남의 재산을 빼앗고 온갖 횡포를 일삼아도 처벌받는 공신은 없었고 세조가 죽을 때까지 공신 견제에 실패한다. 또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양정이나 남용신처럼 무조건 가차없이 죽여 버리기도 하였다. 홍윤성의 경우 자신의 숙부를 살해하였으므로 세조는 기회를 봐서 그를 처벌하려 하였으나, 공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홍윤성의 노비들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투옥시키는 것으로 무마시킨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한 공신들을 대부분 토사구팽하여 죽인 할아버지 조선 태종에 반해, 세조는 공신들을 내치지 않았으며 내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우대하여 결국 훈구파 세력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측량 기기 의상(儀象)을 스스로 제작하기도 해 15세기 과학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도 있다.
국방과 관련해서 치적도 있지만 실책도 많다. 대표적으로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층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 지나치게 궁시 위주로 고과를 편성해서 백병전을 취약하게 만든 것,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이 3명으로 편성된 것을 보인 2명으로 줄어들게 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게 만들고 조호를 지급하는 기준을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꿔서 군인층 붕괴를 유발한 것, 총통위를 없애버린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세조의 실책은 조선군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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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aFrame으로 정리
import pandas as pd
# .txt 파일명을 왕 이름으로 바꾸기 (.txt 제거)
evaluation_df = pd.DataFrame.from_dict(
{filename.replace(".txt", ""): content for filename, content in evaluation_results.items()},
orient="index",
columns=["평가"]
)
# 인덱스 이름 지정 (선택사항)
evaluation_df.index.name = "왕"
# 결과 확인
evaluation_df.reset_index()
왕 | 평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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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 정조_(조선) | 평가 없음 |
1 | 성종_(조선) | 평가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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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철종_(조선) | 평가 없음 |
7 | 숙종_(조선) | 평가 없음 |
8 | 정종_(조선) | 평가 없음 |
9 | 선조_(조선) | 평가 없음 |
10 | 순종_(조선) | 평가 없음 |
11 | 단종_(조선) | 평가 없음 |
12 | 순조_(조선) | 평가 없음 |
13 | 명종_(조선) | 《명종실록》에서는 명종과 명종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n\n \n천성이 자효... |
14 | 예종_(조선) | 평가 없음 |
15 | 태조_(조선) | 긍정적 평가[편집]\n개국 이전[편집]\n고려말 왜구와 홍건적을 비롯한 북로남왜 외... |
16 | 영조_(조선) | 평가 없음 |
17 | 효종_(조선) | 평가 없음 |
18 | 경종_(조선) | 평가 없음 |
19 | 고종_(조선) | 긍정적인 평가[편집]\n외국인들의 개인적인 견해[편집]\n고종 황제를 직접 만나본 ... |
20 | 연산군 | 평가 없음 |
21 | 문종_(조선) | 평가 없음 |
22 | 세종 | 《세종실록》에서는 세종과 세종의 치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n\n \n영민하고... |
23 | 중종_(조선) | 조선왕조실록[편집]\n《중종실록》의 사관은 중종과 중종 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 |
24 | 현종_(조선) | 평가 없음 |
25 | 헌종_(조선) | 평가 없음 |
26 | 세조_(조선) | 긍정적 평가[편집]\n글씨에 뛰어났다는 평이 있다.\n왕권을 강화했고 국방을 튼튼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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